큐티

골로새서 3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petra7 2021. 1. 29. 23:20

* 본문 : 골로새서 1:24~29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고난을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의 죄사함이 이뤄졌으며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데 무엇이 아직 더 남았다는 말일까?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주님을 위하여 여러 고난을 당할 때도 있는데 그런 고난이 바로 주님 자신의 고난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행9:4에 보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했는데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은 지독한 예수 핍박자였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핍박을 했는데 이것에 대하여 주님은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핍박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울은 자신이 행한 일과 더불어 생각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이전의 자신이 행했던 것처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자신은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온갖 박해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요 15:18~19의 말씀을 상기해 본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할까? 자기들의 사상이나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상극의 관계이다. 공산주의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고 기독교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일반 세상에서도 불신자들이 있고 신자들이 있다. 섞일래야 섞일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과연 그러하다. 혼합주의로 나가지 않는 다음에야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생각하면 여러 면에서 너무 많은 비난과 미움을 받고 있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의 영향으로 교회는 마치 동네북처럼 자주 언론에 오르내린다. 정부와 정치와 행정이 교회만 계속 타켓으로 잡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식당에서는 사람들이 비좁게 앉아 식사를 해도 괜찮은데 교회는 식사하면 안된다는 말은 무언가? 백화점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매일, 매시간 들락거려도 되는데 교회는 모이면 안된다고 한다. 5만개가 넘는 교회가 전국에 퍼져 있는데 확진자가 나온 교회가 과연 몇 개나 되는가? 비대면으로만 예배드리라고 압박하는데 온라인을 통하여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가 되겠는가? 온갖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처사가 한 두 가지 아니다. 그럼에도 .... 정은이 사건부터 시작하여 기독교인이, 교회가, 목사와 장로 권사 집사라는 사람들이 자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온갖 사건들에 노출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먼저 대대적인 회개운동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성도 크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생기는 온갖 종류의 고난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을 바로 섬김에 있어서의 문제들이다. 내가 잘못하여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아니라 내 죄의 문제이다. 내가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내가 감당해야 할 고난은 무엇인지 묵상해보자. 바른 믿음으로 살기 위한 고난이라면 그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은 바울과 함께 하여 주셨듯이 나의 손을 잡아 주실 줄 믿는다.